오래된 수첩에서 꺼낸 기억, 영화 <뷰티풀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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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소재를 담고 있다. 천재, 정신분열증,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 그것이다. 한 인간 안에 섞인 천재성과 정신분열증도 엿보고 싶은 이력인데 더불어 세상이 인정하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그가 지금도 현존하는 인물, 존 내시란다.

감독(론 하워드)은 뉴욕타임스 기자인 실비아 네이사가 쓴, 같은 제목의 인물평전을 토대로 아키바 골드먼에게 각본을 맡겨 영화를 제작했다. 평전의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적 재미를 위해 치밀한 심리묘사와 미스터리 기법을 더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졌다니 이 영화를 읽으려면 세 가지 방법을 쓸 수 있겠다. 평전처럼 인물의 사실적 이력중심으로 읽거나, 영화 자체만의 상상력으로 읽거나, 또는 영화와 사실의 복합구조로 읽는 것이다. 내용만으로도 제각각의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방법적인 문제가 여러 가닥이라는 건 이 영화를 평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최선의 승리, 또는 적절한 영향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면서 “이건 존 내시가 만든 '균형이론'이로구만!” 혼잣말을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보통의 헐리웃 영화처럼 흥미로운 소재에 스릴러적인 기법으로 관객을 긴박한 환상으로 끌어간다. 중반부 이후에는 환상을 걷고 리얼리티에 충실하며 현실을 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실재하는 인물임을 밝힌다.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영화를 보면서 꿈과 감정이입에 충실하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은근히 존 내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충동으로 유도한다. 감독은 최선의 효과를 위해 존 내시의 균형이론을 도입한 것 같다.

‘내시균형’이란 무엇인가? 진중권의 시사영화평에 인용된 부분을 재인용해 본다.

“착란에 빠져 평생을 고생한 내시는 1994년에 노벨상을 받는다. 그가 젊은 시절에 만들어낸 '내시균형'의 이론이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내시균형을 설명할 때 흔히 '수인의 딜레마'라는 예를 든다. 가령 체포된 두 공범에게 경찰이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1년, 한 사람이 자백하면 그는 바로 풀어주되 자백을 안 한 자는 10년, 둘 다 자백하면 5년형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자. 이 게임의 결말은 결국 둘 다 자백을 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게 이 게임의 '내시균형' 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자기만 자백하고, 상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이 경우 상대는 10년형을 받겠지만 자신은 곧바로 풀려나니까. 하지만 상대방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라고 자백을 안 하겠는가? 그리하여 모두 자백할 경우 둘 다 5년형을 받게 된다. 반면 두 사람이 상대를 믿고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모두 1년형만 받는다. 이게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이나, 불행히도 이 게임의 '내시균형'은 둘 다 자백하고 5년형을 받는 것이다.”

게임의 규칙이라 불리는 ‘내시균형’은 최선의 승리를 위한 선택이다. 자기를 위한 선택, 타인을 위한 선택, 모두를 위한 선택 중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는 경제, 정치, 또는 여러 분야의 게임을 위해 다각도로 활용되기에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다. 개인적인 평전으로 읽을 것인가, 영화적 상상으로 읽을 것인가, 나를 위해 읽을 것인가, 누군가를 위해 읽을 것인가, 두 개의 딜렘마 앞에서 나도 여지없이 게임 안으로 말려들어 간다. 내시는 결국 50: 50의 결과가 선택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평전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자백을 하는 것, 즉 영화적 상상 속에서 나와 세상을 읽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결과는?

2.

영화에서 프린스턴 대학을 장학생으로 들어가고 MIT공대의 교수로 임용된 잘 나가는 천재 존 내시는 남모르는 질병이 있었다. 과대망상과 환각을 동반한 정신분열증이다. 영화의 전반에는 환각 속의 인물들(룸메이트 찰스와 그의 조카 꼬마여자, 정부의 비밀요원 파처)과 존 내시의 행각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천재수학자인 내시에게는 제자인 엘리샤가 부인이 되는데 그녀조차도 내시의 증세를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한다. 대학원 시절부터 홀로 연구하고 독특한 행위가 많았던 그를 분열증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존내시의 병증세가 정신과의사로부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즉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는’ 병으로 진단되면서 영화의 후반부는 존내시와 그의 아내의 투병기가 된다. 관객도 이 때부터 무엇이 진실인지 인지되며 그들의 투병기에 울고 웃으며 동참한다.

영화는 천재수학자가 아니라 환상을 ?i아 다니는 어린아이 존을 돌보는 아내에게로 옮겨 간다. 그녀는 ‘기적같은 굉장한 일이 꼭 일어나리라’ 믿는 순수한 마음과 언제 아이와 자신에게 해가 닥칠지 몰라 불안해하는 두 가지 마음으로 산다. 아기를 안아줄 수도, 밥벌이를 할 수도, 성적 욕망을 채워줄 수도 없는 남편은 젊디젊은 그녀에게 동반자가 아니라 커다란 짐이다. 엘리샤는 이혼이 큰 문제가 아닌 미국 땅에서 무슨 마음으로 그와 34년을 살았을까?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남편이 가족이라는 것이 그녀의 사랑함에 이유가 되어 준다.

내시는 분열증에서 해방된 것이 아님을 영화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환각의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시의 극복의지가 있을 뿐. 하지만 하버드에 다니는 건강한 아들과 ‘내가 사는 이유, 내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 받는 아내가 곁에 있음은 병과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힌 존 내시와 그들의 삶이 성공했음을 알려 준다.

그 삶의 승리 뒤에는 훌륭한 아내의 돌봄이 있었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존 내시의 성공적인 투병에는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정신분열증을 개인의 인격과 연결시키지 않고 하나의 질병으로 보는 사회적인 시각, 의료적인 접근을 도와주는 주변의 많은 사람, 질병이 있음에도 계속 프린스턴 대학에 머물게 하는 학교 측의 배려, 그 아내를 걱정하고 도와주는 의사와 친구들이 있었다. 결국 한 사람, 한 가족의 병을 사회가 치료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장애인을 보는 시각, 그들을 위한 사회 복지적 제도와 장치는 달라졌다 해도 의식의 변화는 걸음마 단계는 아닌가. 더구나 육체적인 장애가 아닌 정신장애일 때, 우리는 그들과 그들 가족을 사회적으로 격리하거나 죄인, 또는 모자란 사람들로 보는 정서가 만연하다. 하여 그 고통은 가족들의 몫으로만 남겨져 있다. 그것도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가족, 그 연민의 품에서 말이다.

이 영화를 바로 개봉관에서 보았다. 그 당시의 나는 가족관계의 어려움으로 곤란을 겪는 많은 여성과의 만남이 있었고, 가족상담 중에 있었다. 남편의 술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내가 상담한 곳에는 폭력, 알콜, 도박 증세로 얼룩진, 상상할 수 없는 가정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박약이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유전적 문제로 인한 정신질병이었다. 이 질병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병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한(恨)의 역사가, 유교적 정서가, 제도와 관습의 문화가 가져 온 이 사회적 질병을 개인과 가족이 떠안은 이 모순의 현장은 언제 해결될 것인가. <뷰티풀 마인드>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었다. 내시가 수상하는 노벨상 수여식 장면이다. 정신분열을 딛고 천재가 받는 상에 대한 감동이 아니다. 아내에게 영광을 돌리는, 준비되었던, 진실한 마음이던 감동을 주는 수상자의 겸손한 멘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벨상은 커녕 밥상 하나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고통의 가정이 떠올라서였다. 누군가 지상을 내려다 보는 정의의 신이 있다면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담담히 겪은 그 또는 그녀에게 노벨상의 딱지가 아니라 풍성한 밥상 한 끼 차려주시기를 바랬다.

진정 노벨상은 보이지 않는 희생을 치르는 그 또는 그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