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출연 카타기리 하이리,코바야시 사토미

개봉 2007.08.02 일본, 102분

카모메 식당 / 허연희

나이가 든다는 건 몸에서 힘을 빼는 시기는 아닌가 싶다.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내고 싶다. 새로 시작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을 유지하는 것에 더 마음을 쏟게 된다. 자극적인 것보다 슴슴한 맛을 더 찾는다. 반짝이는 것보다는 은은한 불빛이 더 좋다. 화려한 캠프파이어의 열정보다 오래오래 타들어가는 모닥불 가의 이야기가 더 당긴다.

모닥불 같은 영화 <카모메식당>은 일명 슬로우 라이프 무비다. 여성감독 오기가미 나오코는 일상적인 장면을 천천히 펼쳐 놓으면서 마치 내 집에서 편안히 누워 간식을 먹다 잠드는 시간처럼 잔잔하게 영화를 끌어간다. 어떤 영화는 영상을 심고, 어떤 영화는 스토리로 남는다. 어떤 영화는 그냥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된다. 이 영화은 익숙하게 드나들던 단골 식당처럼 마음에 스며 영혼의 배가 고플 때 문득문득 떠오른다. 식당의 주메뉴인 오니기리(주먹밥)가 여주인의 설명처럼 소울푸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모메식당>의 따스하고 향기로운 여운 자체가 음식이다. 오래 전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꿈을 꾼다. 그런 식당을 현실에서 만나기를, 그런 식당의 여주인이 나이면 좋겠다는 꿈을.

영화는 핀란드 헬싱키가 배경이다. 각자 사연을 안고 일본에서 핀란드로 온 세 여인이 등장한다. 먼저 헬싱키 한 골목에 식당을 개업한 사치에는 한 달 째 손님을 맞지 못한다. 첫손님인 일본적인 것의 오타쿠인 토미라는 청년을 만나며 미도리와도 인연이 된다. 떠남이 필요했던 미도리는 눈감고 세계지도에서 손가락으로 짚은 곳이 핀란드라서 그냥 온 여인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미도리는 <카모메식당>일을 보조하게 된다. 또 다른 여인 마사코는 20년 간 해왔던 부모님 병간호를 마치고 이 땅을 찾아 온다. 어깨에 진 짐을 놓고 새로운 삶의 시작에 있는 그녀지만 공항에서 짐을 잃고 만다. 짐을 찾아 헤매는 마사코 역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커피 한 잔 하러 들른 식당에서 사치에의 호의로 짐을 찾기 까지 식당일을 돕기로 한다.

사치에의 식당경영철학은 소박하지만 단단하다. 커다란 레스토랑의 근사한 메뉴가 아닌 누구나 들러 편안히 먹을 수 있는 일본의 일상음식을 만든다. 핀란드인이나 향수병에 시달리는 일본인의 입맛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집밥 같은 전통적인 일본식이다. 그 중 오니기리란 주먹밥은 잘 알려진 초밥이나 사케같은 음식과는 다른 일본인의 소울푸드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소풍날과 운동회 때 꼭 싸주시던 주먹밥은 사치에의 영혼에 새겨진 아버지의 사랑이자 정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해온 합기도의 기본자세와 함께 건강한 몸과 정신의 배경이 된다. 딱 7개의 나무식탁에 내 집의 주방만한 곳에서 야무진 사치에의 음식이 만들어진다.

처음엔 문밖에서 보기만 할 뿐 선뜻 들어서지 못하던 핀란드 세 할머니도 새 메뉴인 시나몬롤의 향에 이끌려 식당을 찾는다. 점점 손님은 늘고 <카모메식당>의 7개 식탁은 만석이 된다. 쿨하고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사치에의 담백하고 성실한 자세는 드디어 꿈을 이룬다.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가득찬 식당, 그 꿈 말이다. 마사코가 “원하는 일을 하는 당신이 부럽군요.”라고 했을 때 사치에는 “아니예요.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이예요”라고 했다. 큰 뜻을 품고 주장하고 성취하는 것에 목소리를 높이던 젊은 시절엔 이 말이 무심하게 들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치에의 정돈된 생활자세와 철학을 엿보면 자기실현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성숙한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 만석이 된 식당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그날 저녁 수영을 하면서 홀로 자족하던 순간, 박수소리가 들린다. 주변에서 수영하던 많은 사람이 그녀를 향해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사치에 내면의 박수일 것이다. 충일하게 차오르는 온전한 순간, 자기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내면의 박수소리. 푸른색의 풀장에 꽃처럼 피어있는 사람들, 이 장면은 만다라를 연상시켰다.

이제 이 영화가 음식이라면 내가 먹은 메뉴들을 소개하려 한다.

1.“세상이 끝날 때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오호, 그래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요. 아주 좋은 재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하고 싶어요. 오늘 내 식당에 들르는 사람이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작은 행복을 누린다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지요.

2. “슬픈 사람은 어디에나 있군요.”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라, 핀란드의 사람들이라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남편의 배신에 심한 우울증을 앓는 핀란드여인을 식당의 세 여자와 토미가 돕는다. 이야기하는 여인, 들어주는 여인, 언어가 달라도 마음으로 안아주는 공감. 어지간한 세월을 겪은 나이와 역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 슬픈 여인은 상실의 강을 무사히 건넜다.

3.“누군가 당신만을 위해 끓여주면 더욱 맛이 진하죠.”

인도네시아엔 루왁이란 야생고양이가 산다. 그 녀석들은 원두 중에 가장 달콤한 것만 골라 먹고 위에서 정제되고 배설되면 최고의 원두를 생산한다. 커피루왁이다. 귀해서 ‘커피의 유령’이라 칭하는 이 커피의 전설과 레시피를 전 남자주인이 알려준다. 사치에는 말로 내세우지 않지만 ‘당신만을 위한 한 잔의 정성, 커피루왁을 끓여드려요. 첫 손님인 토미에게는 평생 공짜로 제공합니다.’의 자세를 보여준다. 주부인 나에게 요리인생의 첫손님은 가족이다. 그들에게 당신만을 위한 음식을 평생 무료로 제공하는 주부들이 떠오른다. 단 늘 그럴 수 만은 없고 주부는 결혼한 여성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4.“핀란드인은 왜 고요하고 평화로울까요?” “숲이 있기 때문이죠.”

마사코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는 핀란드청년 토미. 숲의 생명을 받아 안은 축복의 나라 핀란드도 부럽고 숲의 가치를 알고 있는 토미도 대견하다. 공기처럼 물처럼 보이지 않게 생명을 전하는 조용하고 단단한 사람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그들이 하늘이 아닌 땅에서 움직이는 '갓챠맨'들은 아닐까?

5.하나뿐인 지구를 지켜라!

토미가 궁금해 한 ‘갓챠맨’(독수리 오형제의 일본원제)의 가사가 이들을 만나게 했다. 사치에의 말을 빌면 ‘갓차맨 가사를 아는 사람 중엔 나쁜 사람이 없다’니까 가사를 찾아 보았다.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하늘엔 그림자가 춤추고/위대한 하얀 날개의 갓챠맨/영원한 불새의 힘으로/힘차게 날아올라라/날아라 날아라 갓챠맨/나가자 나가자 갓챠맨/하나뿐인 지구를 위하여/오 갓챠맨 갓챠맨